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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월 11, 2024
종교기독교고대 유대교의 “지옥”으로서의 게헨나 = A의 역사적 근거

고대 유대교의 “지옥”으로서의 게헨나 = 강력한 은유의 역사적 근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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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미 모란

9. 하나님께서 그의 인간 '자녀'를 게헨나/지옥에 버림으로써 영원히 형벌하신다는 믿음은 이교도 숭배자들이 게 힌놈 골짜기에서 그들의 자녀를 불에 희생시키는 것과 이상하게도 유사합니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저주의 '신'이 '숨겨진 아버지' 야훼가 아니라 참소자인 사탄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사야, 49, 14-15= “그러나 시온[이스라엘]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셨고 나의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다 하였느니라.” 그러자 여호와께서 대답하신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겠느냐? 이 사람들이라도 잊어버릴지라도 나는 너희를 잊지 아니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게헨나/지옥이 정중한 동료들과 함께 해산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징벌적 오해에서 벗어나면 더욱 강력한 점이 있습니다.

10. 스스로를 '서사적 역사적' 해석학으로 스타일링하는 게헨나에 대한 현대적 해석 중 하나는 이스라엘이 이교도 이웃과의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지옥의 도상학을 더 잘 이해함으로써 유대교와 기독교의 많은 텍스트에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가는 길에 어떤 구타를 당하더라도 마침내 그들을 옹호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반복적으로 피해자가 되는 오랜 역사적, 정치적 투쟁 끝에 마침내 야훼는 유대인들을 지지하고 증명하며 옹호하고 칭찬할 것이며 그들의 이교도 박해자들에게 '지옥을 주실' 것입니다. .

이 해석은 이사야와 예레미야에게도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해석은 유대 국가의 임박한 멸망과 바빌론 유배에 대한 경고로 이스라엘에 오는 '지옥'에 대한 언급을 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자체는 게헨나/지옥처럼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 19, 2-6; 19, 11-14] 일단 그것이 아시리아인들에게 함락됩니다. 왜? 이스라엘이 무너지면 그 곳이 쓰레기 골짜기처럼 되어 불이 그것을 삼키고 그 시체를 벌레가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지옥의 이미지는 “꺼지지 않는 불”(마가복음 9, 43-48, 이사야서 인용)과 “벌레가 죽지 않는 곳”(이사야, 66, 24; 마가복음 9, 44장에서도 예수님께서 반복하셨습니다. 9, 46; 9, 48] 죽음 이후에 우리가 가는 어떤 존재의 상태나 어딘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생에서의 파괴, 몰락의 이미지입니다. 이스라엘과 그 아시리아의 적들은 그들이 '무너지고' 파멸된 후에 이 지옥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악에 대한 그들 자신의 중독은 그들에게 이 끔찍한 파멸을 가져올 것입니다.

악의 길의 최종 파괴로서 지옥의 의미에는 적어도 두 가지 매우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악의 길에 굴복하는 사람들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확실히 그들이 그 힘으로 소중히 여기고, 추구하고, 구축한 것의 종말입니다. .

 [1] 악한 행위는 결국 '소용이 없다'는 경고는 특정 상황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변함없는 점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선한 길을 걷는다는 것 자체가 단순히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쉬운 길의 반대인 어려운 길이지만, 더 중요하게는 세상 세력의 반대를 받고, 악한 세력이 '은밀히'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들을 실행합니다. 지옥은 존경이라는 가면, 진정한 윤리적 올바름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윤리적 범법을 용인하는 인간 법에 의한 타당성, 그리고 유혹하고 유혹하는 '지상 낙원에서의 좋은 삶'에 대한 중독된 환상 이미지의 전체 녹청 아래 '숨겨져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포착하고 부패시키기 위해 아첨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믿음과 진실함과 정의와 자비'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험난한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악의 길은 오랫동안 번영하고 통치할 것이며, 그것에 반대하는 자들은 종교적이든 아니든 간에 그들의 입장 때문에 '지옥'을 당할 것입니다.

지옥의 이미지는 복수에 대한 유치한 충동을 충족시키기 위해 구속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결코 구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구속을 위해 일하고 '힘든 싸움'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실제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망가진 포도원의 이 일꾼들은 포도원에 다시 꽃을 피우려고 노력하면서 구원을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그것이 공개되었습니다. 결국 여러분은 의로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악한 자와 그의 종들이 '높은 곳의 악'에까지 이르게 함으로써 좌절과 '형벌'을 참아내더라도, 믿음의 도약, 즉 알려지지 않고 안전하지 않은 것에 대한 신뢰는 유지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세요. 수건을 던지지 마십시오. 따르지 않는다. 거짓말에 맞서 진실을 옹호하는 데 과감히 '목공 작업'을 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 동일한 악을 행함으로써 자신에게 가해진 악을 전달하는 것에 저항하는 것은 존중받지 못하거나 물질적으로 보상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투쟁은 그 자체로 본질적인 보상이며, 중요하게도 장기적으로 '승리'할 것입니다.

거짓과 무정함만을 섬기는 사람들, 그들의 삶, 그들의 행위, 악의 성공, 헛된 영광의 건물들은 엄청난 규모와 무자비한 멸망으로 끝날 것입니다.

이러한 파괴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한 삶의 계획에서 진리를 배반하고 사랑을 거부하는 것에 대한 '최종 판결'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영의 세계뿐만 아니라 육체와 영혼뿐만 아니라 복합 창조물뿐만 아니라 아마도 더 나은 일부가 아닌 이 세계의 궁극적 중요성에 대한 유대인의 강조를 고려할 때 내세에 대해 어떤 의미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나쁜 부분은..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이 엔드게임에서 맹렬하게 활동할 신비한 영적 힘에 대해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은 내세에 대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악행에 대한 영원한 형벌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악행자에게 은폐되기 쉬운 두 가지 현실을 경고합니다. [a] 그들은 결국 이 세상에서 보낸 시간에 대한 증거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세상에 남긴 유산은 그들이 이 세상의 구원에 아무 기여도 하지 않았으므로 이 세상에서 그들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죄책감과 수치심의 기록만 남게 됩니다. [b] 그러나 또한 더러움과 쓰레기와 비진리와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세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X, Y, Z를 행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성한 진리이며, 신성한 사랑, 진실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어떤 것도 그 안에 '거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생에서 우리는 진실로부터 숨을 수 있고, 사랑으로부터 숨을 수 있으며, 한동안 '그것을 피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이 삶을 떠나는 것은 발가벗겨지는 것과 같습니다. 더 이상 숨지 마세요. 우리의 진실함과 허위, 사랑하려는 시도와 사랑을 회피하는 것의 진실이 드러납니다. 드러난 것 이상이다= '영원히' 살아남을 수 없다. 짧은 '유통기한'이 있지만 영원히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 밖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에 대해 말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집, 요트,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적인 것들을 잠시 동안만 관리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원한 삶을 영위할 때 그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오직 진리와 사랑의 행위만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가는 명예의 예복이 될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가 거짓과 사랑 없음에 깊이 동일시되고 그것에 투자한다면, 죽음은 충격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토록 가치를 두었던 모든 것, 그러한 희망이 무가치하고 일시적인 것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신문에 불이 붙은 것처럼 다 타버리면 '우리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짜 거지로서 영원한 세계에 들어갈 것입니다.

11. 이사야서에서 지옥은 “불타는 곳”(이사야, 30, 33)이라고 불리며, 이 불타오르는 것이 '저주받은 것'이라는 것은 침략군이 약탈한 후 폐허가 된 도시만큼 구체적이지 않고 더 강력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신비롭다.

역사적-서사적 해석학 자체를 너무 문자 그대로 밀어붙여서는 안 됩니다. 몰락, 즉 파멸은 영적인 의미와 실존적인 의미뿐 아니라 정치적, 역사적 맥락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의미를 하나로 묶는 것은 '파괴'가 인간의 마음에 실제로 의미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은 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오직 마귀만이 벌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맘몬을 위해 우리 인간성을 희생할 것을 요구하는 우상 숭배의 '거짓 신'으로서 '상과 벌 시나리오'의 설계자입니다. 사탄의 종교는 비인간적이고 반인간적이며, 이러한 입장에서는 공격하고 실제로 희생을 치르며 모든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아이는 너무 연약하고 구부러지기 쉽고, 너무 대담하고 엉성하며, 밀과 가라지가 너무 많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 사탄의 종교는 우리의 기본적인 인간성의 이 역설적인 혼합을 '분리'하고 '이렇게든 저쪽으로든' 결정하기를 원하며, 이생에서 양과 염소를 시기상조로 가혹하게 나누는 영원한 추방과 영원한 고문의 위협. 사탄 종교는 누가 '안에' 있고 누가 '밖'에 있는지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기 전에 미리 결정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합니다. '안'은 마음이 좁아서 사탄의 위협에 끌려가고 있습니다. '밖'은 마음이 더 광범위하고, 갈등하고, 혼합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 결국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읽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너무 일찍 정죄하지도 않으시며, 마음이 쇠퇴하는 것을 용납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처벌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멸망시키십니다.

악은 노골적으로(역사적-정치적으로) 파괴되지는 않지만 더 내적으로(심리적-영적으로) 파괴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하는 악은 우리 자신의 마음을 '지옥'에 두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의미가 수렴되는 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비진리의 불이 진리의 불 속에 '영원히 머물' 수 없다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므로 비진리를 소멸하는 진리의 불타오르는 일이 이생에서 일어나건, 우리가 죽은 후에 일어나건, 어느 쪽이든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 영의 불에 대한 천상의 경험은 기쁨이자 열정의 강렬함입니다. 동일한 정신의 불의 지옥 같은 경험은 열정의 고통입니다. '악인에게는 안식이 없다'= 고통은 결코 쉬지 않고 우리에게 평화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인류와 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우리의 비진리를 붙잡고, 그 폭로에 저항하고, 그것을 쓰레기처럼 놓아버려야 할 필요성을 거부할 때 고통은 일어나고 계속됩니다. 즉, 불에 타서 벌레가 먹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정화의 기회는 지상 생활에서 시작되며 아마도 내세까지 계속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그것을 피했다면 죽은 후에 정화의 기회를 잡기를 바랍니다.

12.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부인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불이 타오르는 것이 하늘의 불인지 지옥의 불인지 구별하는 데 왜 관심이 있습니까? 왜 말하지 않습니까? 무슨 큰일이야? 소란을 피우자.. 진정하자..

마음과 행위에 있는 비진리가 우리를 데려가는 지옥은 행동이 중요하지 않다면 무시하거나 가볍게 무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행동이 중요하지 않다면 마음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중요하지 않다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오시려는 '불기관'이 상실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재앙이 될 것입니다. 잘못에 대한 처벌은 사탄적인 것입니다. 대조적으로, 마음 속의 악과 그것이 세상에서 행하는 행위는 행위자와 다른 모든 사람에게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마음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보좌 수레가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비진리가 진리의 불에 타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문이 되는 인류의 소명을 완성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지옥은 인간 마음의 심연에 있습니다.

13. 지옥에 대한 이러한 실존적 이해를 고려할 때, 예수께서 신약에서 게헨나를 11번 언급하신 방식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가 반복해서 반복하는 모티브 중 하나는 온전하여 이 건강, 재능, 힘을 사용하여 악을 추구하는 것보다 지옥에 가는 것을 막는다면 부상을 입거나 불완전한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네 지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이 네게 나으니라”(마태복음 5, 29; 또한= 마태복음, 5, 30; 10, 28; 18, 9; 23, 15; 23, 33; 마가복음, 9, 43; 9, 45; 9, 47; 누가복음, 12, 5].

이는 새로운 방향, 즉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부상과 불완전함을 통해 우리는 악에 대한 '강력한' 집착을 멈출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모든 사람의 가슴 깊은 곳에서 가슴 아픈 상처를 받을 만큼 부서질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상심할 때 우리는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더 나은 위치'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인류의 깊은 곳에서 지옥을 약화시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는 '천국과 지옥'의 이원론을 종식시킨다.

이것은 기독교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극단적인 십자가의 길을 걷도록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것을 시도한 첫 번째 사람은 그리스도 옆에 십자가에서 죽은 착한 도둑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의인이 아니라 불의한 자라 인정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무가치한' 삶에 대한 엄격한 이원론적 판단에 따르면, 그는 죽음 이후 천국이 아니라 게헨나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는 불의한 도적이 의인보다 먼저 구원받은 자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반전이 있습니다. 의인에게는 '십자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손실입니다. 만일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헤아릴 수 없는 심연에 있는 인간 마음 속 뿌리 깊은 곳에서 지옥을 깎아 '천국 대 지옥'을 종식시키는 것을 놓치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가 지옥을 끝낼 것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 그의 수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천국 대 지옥은 카르마처럼 상대적인 진리입니다. 모든 행동이 온다; 십자가에서는 그것이 역전되어 영원한 진리가 되지 못합니다. 고통과 역전을 통해 얻은 또 다른 진실은 지옥이 '숨겨져 있던' 바닥 없는 심연에서 드러납니다.

유대인들은 지옥을 '왕국이 임함'의 반대말로 이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옥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배반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하여 우리의 후회와 자책이 우리 마음을 끔찍하게 파고듭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스스로 깨닫는 마음의 이 지옥을 끝냅니다. 십자가의 길은 실패와 상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옥에는 하나님의 비밀, 즉 '숨겨진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지옥이 인류의 '길의 끝'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악마입니다. 지옥은 배척하는 자들을 버리는 영적인 쓰레기통이며, 지옥이 인간 쓰레기로 가득 차 있을수록 마귀는 그것을 더 좋아합니다.

마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지옥에서, 그리고 지옥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지옥은 십자가를 통해 '통해'가는 과정이 됩니다.

불타오르는 최악의 위기의 순간은 가장 극적인 반전의 순간인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들의 깊은 곳에서는 갑자기 뒷마당에서 여름 토네이도처럼 변화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깊은 곳에서는 가장 온화한 봄비처럼 눈에 띄지 않게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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